백남준관련 철지난 기사들
Sunday, February 15th, 2009<기자수첩> 편히 눈감기 어려운 백남준 [2006-03-19 10:29 입력]
“구보타 시게코가 모든 문제의 발단입니다. 그녀는 백남준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괴롭혔어요.”"한국 화랑 관계자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경기문화재단과는 영원히대화하지 않을 생각입니다.”18일 저녁 백남준의 49재를 마친 백남준의 장조카 켄 백 하쿠타(한국명 백건)는 예상 수위를 넘는 거침없는 발언으로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켄은 자신이 백남준의 ‘유언집행인(executor)’이며 백남준의 예술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백남준을 둘러싼 갈등관계를 소개했다.
켄에 따르면 2002년 백남준이 구술하고 켄 자신이 받아 적어 만든 유언에 따라 백남준 사후 일본인 부인 구보타 시게코는 뉴욕과 마이애미, 도쿄에 있는 아파트와 뉴욕 스튜디오 4곳 중 3곳 등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켄 자신은 백남준의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권리와 뉴욕의 메인 스튜디오 1곳을 상속받았다.
49재를 앞두고 구보타 여사와 따로 방한한 것과 관련해 켄은 “백남준은 시게코가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30년간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시게코는 백남준을 구타하기까지 했으며 공개석상에서 ‘같이 죽자’고 소리쳐 백남준이 ‘그럼 너부터 죽어’라고 맞선 적도 있다”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켄의 한국 미술계에 대한 불신도 교정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는 백남준 작품을 많이 다룬 국내 화랑들의 이름과 백남준의 작품을 소개한 큐레이터나 지인들의 이름을 줄줄이 대며 “그들은 여러 차례 우리를 속였다. 다시는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아울러 국내에 널려있는 백남준 작품의 진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 건물 로비에 있는 백남준의 작품을 본 뉴욕 현지 관계자들이 고개를 저었다”며 “그렇게 수준 낮은 작품이 백남준의 작품이라는 걸 믿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에 방한한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49재 전날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 남편의 작품을 둘러본 것에 대해 “미술관이 시게코를 납치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날 오후 시게코가 백남준 미술관 부지를 찾는데도 개입했다”고까지 해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백남준의 서명이 된 마지막 작품 ‘엄마’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할 수 없다며 “구겐하임미술관으로 가게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백남준 미술관 추진을 놓고 갈등 중인 경기문화재단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인사를 거명하며 “그들과는 영원히 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경기문화재단이 백남준의 작품을 많이 확보했고 방대한 아카이브를 보유했지만 백남준의 모든 작품과 자료에 대한 저작권은 내가 갖고 있다”고 강조하며”그들이 작품을 전시하거나 자료를 상영하는 것은 자유지만 엽서를 만들거나 달력을만들려고 한다면 내 동의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물론 켄의 주장을 전부 믿기는 어렵다. 국내 화랑들은 백남준의 병세가 나빠지면서 칼자루를 쥔 켄 측이 지나치게 작품가격을 올려왔으며 백남준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막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보타 여사는 자발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경기문화재단을 찾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인들은 구보타 여사가 켄으로부터 수모를 많이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백남준 미술관을 추진하면서 켄 측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경기문화재단은 상대의 무리한 요구와 독단적인 행동으로 크게 고통받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죽어서 말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예술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고 있는 조카와 반평생을 함께한 부인, 고국의 미술계가 벌이고 있는 이같은 추한 다툼을 본다면 편히 눈을 감을수 있을까.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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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백남준 부인 쿠보다씨 외로운 방한 [2006-03-16 17:17 입력] 기사제공 :
고(故) 백남준과 반평생을 함께 한 일본인 부인 쿠보다 시게코(69)씨가 휠체어에 탄 채 16일 오후 4시46분 뉴욕발 대한항공편으로 방한했다. 쿠보다 여사는 도착 후 “비행 내내 남편의 고국을 찾는다는 마음에 행복했다”며”남편의 영혼이 하늘을 떠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하루 전인 15일 백남준의 유분을 들고 방한한 백남준의 장조카 켄 백 하쿠다, 백남준 스튜디오의 존 호프먼 큐레이터, 한국인 대변인 안성숙씨 등과는 별도로 혼자 입국해 백남준 사후 유족간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했다. 이날 오후 8시45분에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편으로 백남준과 절친했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 존 헨허트씨도 방한했다.
봉은사에서 이날 백남준의 유작 ‘엄마’를 공개한 켄 백 하쿠다씨는 쿠보다 여사와 따로 방한한 이유에 대해 “그저 일정이 달랐을 뿐”이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백남준 미술관 건립문제로 켄 백 하쿠다 측과 마찰을 빚고 있는 경기문화재단과 국내 지인들은 쿠보다 여사가 백남준 유분의 방한 일정을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려 방한 일정을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 니가타 출신으로 도쿄에 살고 있던 쿠보다 여사가 백남준을 만난 것은 1963년 6월 백남준이 도쿄 소게츠(草月) 회관에서 퍼포먼스를 했을 당시. 그 당시 이미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스물여섯의 젊은 예술가 쿠보다여사는 서른한 살 백남준의 피아노 때려부수기 퍼포먼스를 객석에서 바라보면서 연민에 가까운 애정을 느낀다.
쿠보다 여사의 줄기찬 애정 공세를 거부해오던 백남준은 만난지 14년이 지난 1977년 결혼에 승낙했고, 쿠보다 여사는 지난 1월30일 마이애미에서 백남준을 임종할 때까지 백남준과 함께했다. 한편 켄 백 하쿠다씨와 쿠보다 여사 등은 17일 오후 봉은사에서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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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백남준 추모특집] 큰 별 지다. 故백남준 선생을 기억하며..-99년 마이애미 현지인터뷰 글+사진/김명렬,정리/이인선 | [2006-02-03 04:29 입력]
故백남준 선생이 던지는 말은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만큼이나 센세이셔널하고 명쾌한 것이었다.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빚어내는 예술과 함께 그가 남긴 이야기들은 이 시대는 물론 다음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게 되지 않을까.
`예술은 고급 사기`라는 말은 백남준 어록의 최상단을 차지할 것이고, 그가 한 이야기 중에 `인생은 시큼털털한 썩은 막걸리`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항상 앞서가길 원했던, 그래서 누구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다간 백남준. 그 자신이 걷는 길이 곧 세계 미술사에 열린 또 하나의 새로운 통로였던 백남준.
이 시대에 거장으로, 커다란 발자욱을 남기고 간 그를 기억하며 1999년 티켓링크가 펴낸 월간지의 스페셜 이슈로 다루어진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예술과 삶에 대한 백남준의 명쾌하고 솔직한 태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 편집자 -
미국 마이애미 현지 인터뷰 - 백남준
예술, 그거 익은 밥 먹고 신소리 하는 거지!
뉴욕에 백남준은 없었다. 뉴욕 최고의 미술관 중의 하나인 구겐하임 미술관이 이미 6년 전에 그의 대규모 회고전을 제안한 이래의 오랜 결실이 화려하게 개막되고, 뉴욕 예술계 – 곧 세계 예술계의 이목이 한 눈에 쏠려 있음에도 정작 주인공은 그 현장에 부재했다.
“Namjun is in Miami, He will be back to New York at the end of March.”
살집이 넉넉한 목소리, 그래서 필경 그의 아내 구보다 시게코일 것으로 짐작되는 하이 톤의 목소리가 백남준이 밀려드는 방문객과 인터뷰 요청을 피해 바로 며칠 전 마이애미로 건너갔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마디 더 묻기도 전에 “I’m sorry.”라면서 수화기가 내려지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다시 마이애미로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간접채널을 통해 어렵게 얻은 그의 마이애미 연락처로 전화를 넣으니 그의 간병인이자 스케줄을 관리하는 스티브라는 이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그 또한 인터뷰 요청을 사양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긴 설득 끝에 “마이애미로 온다면..”하고 망설이는 대답을 한다. 그 망설임이 되돌아서기 전에 이번엔 기자가 “I’ll be there tomorrow morning.”이라고 얼른 못을 받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백남준. 세계의 무대에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한국인 아티스트 중의 하나이다. (그와 필적할 만한 이름이 있었다면, 작고한 고암 이응로, 윤이상 정도가 아닐까.) 그를 두고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세상은 부르지만, 정작 그는 누가 뭐라든 심드렁하다. (오래 전 한 중견기자가 그에게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가?라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인 즉 “그런 거 잘 모른다. 아무러나 죽 끓여먹고 살면 되지.”였다.)
그렇더라도 그가 반세기 가깝게 유럽과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얻어온 별명을 열거하면서 그의 모습을 짐작하자면, 발명의 천재, 문화적 테러리스트, 비디오 철학자, 세계 제일의 배짱 좋은 피아니스트, 전자 다다이즘의 애비, 전자예술의 미켈란젤로 등등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곱게 예술을 해온 이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한 별명들이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업을 두고 평가하기를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 백남준에 대한 찬사는 음악을 듣는 개념에서 보는 개념으로 치환시킨 점과 테크놀로지의 온갖 기교를 예술의 푸대에 담아 시각화시킨 점, 과학적 비디오 테크놀로지를 자연주의적 감수성으로 다듬어 동양적 사유의 공간으로 끌어들인 점” (유준상) 등등으로 요약된다고 정리하지만,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이들이 보는 백남준의 예술의 이력은 얼핏 단순하고 통쾌할 뿐이다.
그가 해온 작업은 어떤 것이었는가. 돌아보자면 백남준은 약관의 나이로 독일로 건너간 이래 수없이 부수고, 잘라버리고 벌거벗고 엉뚱한 발상을 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 발상을 표현해왔을 뿐이다. 과연 얼마나 때려부쉈길래 사람들이 열광했는가.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내가 피아노를 조금만 부숴도 사람들은 아주 때려 부쉈다고 전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 안에 이미 있는 기대감이 나의 부숨을 증폭시켜 받아들인다.”
우리들이 마음 속에서 원하되 무의식적인 검열(문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건, 사회적 제도에서 이유된 것이건)에 의해 그 금제(禁制)의 선에서 한 발짝 물러설 때 백남준은 그 선을 거침없이 넘어서 왔다는 설명이고, 그 넘어섬에 대한 뜨거운 박수를 보는 그의 해석이다.
백남준 작업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가 첼리스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던 샤로트 무어맨과의 공연에서 백남준과 그녀가 함께 반 벗은 몸으로 몸을 첼로 삼아 연주를 하다가 급기야는 노출과다로 경찰에 연행된 일이다.(관객들이 즉석에서 걷은 모금으로 보석을 내주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에피소드를 두고 백남준은 이렇게 고백했었다.
“20세기 음악에서 새로운 해방(음열비결정주의, 액션의 도입)이 왔으되, 나는 또 하나 끊어야 할 쇠사슬을 발견했다. 왜 회화와 문학에서의 주요한 주제인 성(性)이 음악에 있어서만 금지되어 있는가. 음악사는 그 자신의 로렌스나 프로이드를 요구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매체를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받아들이고 제도와 관습이 그어놓은 사슬과 금을 누구보다 먼저 끊고 넘고 그래서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미답의 영역을 향해 자신의 전부를 던져온 것. 그것이 백남준 예술의 지난 과정이 아닐까, 돌아보는 중에 뉴욕의 새벽을 떠난 비행기가 마이애미 공항 활주로를 달리고 있다. 아직 겨울옷을 벗기 힘든 뉴욕. 그러나 마이애미는 한여름의 햇살이 강렬하다. 강렬하되 태워버리는 강렬함이 아닌, 푸근하게 데우는 부드러움이 그 속에 있다. 치유될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주는 햇볕이다. 백남준의 아파트먼트는 마이애미 비치의 해변가에 바로 붙어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거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스티브가 나와 안내를 한다.
백남준. 그는 문을 등지고 휠체어에 앉은 채 원탁 위에 펼쳐진 스케치북에 크레용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얼핏 보니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천진하고 또 자유롭다. 준비한 조그만 선물을 드리고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안부를 묻고 마이애미의 일과를 묻는 의례적인 인사 겸 질문이 있었으나 그는 그저 담담하다. 자, 인터뷰를 하러 왔으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라는 표정이 그 얼굴에 있다. 허례와 무관한 삶 앞에서의 예의가 조금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기자도 레코더의 온 스위치를 올리며 일찌감치 긴장의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구겐하임은 당신의 두 번째 대규모 회고전이다. 구겐하임 이후의 작업을 예상한다면?
“그동안 전자 미디어를 많이 써왔다. 이번 전시회는 레이저가 비중이 크고.. 앞으로는 액정 텔레비전을 활용한 작업이 많아지지 않을까?”
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아직까지 왼쪽 반신이 불편한 그인지라 언어가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조금 걱정하고 있던 기자에게 돌아온 그의 첫 대답은 자못 유창하고, 선명한 의식의 바탕 위에서 나오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안심이다. 이 정도라면 마음껏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다.
-마이애미는 당신에게 어떤 곳인가?
“여러 해 전에 장만해둔 조그만 아파트 겸 휴양지이다. 일년에 한번 정도 쉬러 온다. 흔히 재충전이라고들 하지, 아마….”
-당신은 지난 30년 동안 뉴욕을 무대로 작업해왔다. 뉴욕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곳인가?
“우리 집이다. 나는 지붕이 없으면 조금 불안한데, 뉴욕은 편한 집과 같다. 또한 뉴욕은 21세기의 상징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내 공부가 되는 곳이다.”
-공부라면?
“요즘은 인간의 진화를 공부한다. 몸이 반신불수되고 불편해지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다. 코끼리의 코는 언제 그렇게 길게 되었지. 또 우리는 언제부터 개를 기르게 되었나. 개가 처음에는 늑대였을텐데, 늑대가 개가 되는데 얼마나 걸렸나. 뭐 이런 생각들이다. 2,3년 후에는 석기 시대를 공부하려고 한다. 그쪽 작업이 나오면 재미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화두와는 사뭇 달라진 관심일 것 같다.
“인생은 청산유수라고 말이야. 항상 도는 것이니까.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그런 것이지.”
-지난 20세기를 정의한다면?
“뭐니뭐니해도 물질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또한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며 많은 사람이 죽기는 했으되 민주주의란 놈이 보호됐으니, 나름대로 플러스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본다.”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도 묻는다면?
“하이테크의 발달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다만 이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하이테크가 되어야 한다.”
-몸이 불편해진 후 작업은 아무래도 전과 같지 않겠다. 그 불편함이 작업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정신의 변화는 없지만, 아무래도 조수하고 꼭 같이 해야 하니까… 말하자면 디테일은 내가 할 수 없고, 큰 지침을 잘 내야 한다. 조수 다섯 명이 다 잘 이해해야 예술이 만들어진다. 말(言)로 가는 예술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 구겐하임 전시 중 동그라미, 삼각형, 네모와 레이저를 결합시킨 것이 있는데, 젊은 애한테 10분 말하고, 만드는 데 이삼개월 걸렸다. 어떤 것은 이삼년 걸리기도 한다.”
-조수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도 예술가들인가?
“일정치 않다. 어떤 애는 텔레비를 운송하는 애이고, 어떤 이는 독일에서 온 레이저 전문가이고.. 레이저는 아직 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전공한 사람은 직업을 구하기 어렵고, 거꾸로 찾는 사람도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과거의 파인 아트에 대한 엄격한 정의와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때이다.
“예술가는 신진대사가 빠른 놈들이니까. 새로운 변화를 대체로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다.”
-예술가를 정의한다면?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하는 것이 예술가이다.”
백남준다운 통쾌한 정의이다. 이미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84년 금의환향했을 무렵 한 방송대담에서 “예술은 고등사기에 불과하다.”라는 화두(?)를 던져 자못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연장선상에 선 정의인 셈이다.
“그때의 정의는 지금 생각해도 잘된 것이지. 마르셀 뒤상도 거의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쨌든 19세기야 낭만주의자들의 세기였으니 그렇다치고 지금은 기계적이고 차디찬 쇼크를 던져주어야 한다.”
-당신의 내부에 창조적 상상력이 움직일 때는 언제인가?
“의식과 무의식이 접목되는 순간이다. 나에게는 그 순간이 낮잠 잘 때이다. 자고 있노라면 머리 속에 있는 무수한 서랍 중에 어떤 것이 나도 모르게 열린다. 그때가 무심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이다.”
그런데 자네 부모님은 다 서울에 계신가, 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이 기자에게 거꾸로 날아왔다. 기자도 자연히 질문의 방향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잠깐 그의 가족사를 돌아본다면, 백남준은 1932년 서울 서린동에서 당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과 조종희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당대의 부호 중의 막내였으니 그에 대한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유난히 좋아했던 백남준은 유복한 환경에 힘입어 개인교수를 두고 피아노와 작곡을 배울 수 있었다.
17세가 되었을 때 백남준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명을 받아 한국 인삼수출의 총대리인으로 홍콩으로 가게 된 부친의 뒤를 따라 유학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 뒤 한국전쟁과 피난생활, 동경유학(동경제대)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애당초 백남준은 파리로 가고 싶어했으나 데카당한 도시라는 이유로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뮌헨으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당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 분은 돈을 준 분이다.(백남준 식의 표현을 풀어쓴다면, 어머니로 인해 예술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어릴 때 음악책 한 권 살려면 노동자 한두 달 월급에 해당되는 돈이 들어갔다. 그때 이후로 독일 시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나에게 계속 돈을 보내주었다.”
-당신의 예술 첫 출발은 음악이다. 언제 퍼포먼스로 건너가게 되었는가?
“독일에서 1959년 존 케이지를 만났다. 그 친구는 인생은 자유이다, 라는 화두 아래 작업을 이미 활발히 하던 이이고, 나는 아직 데뷔도 못한 채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케이지의 작품 보다는 그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좋아했다. 그에게 받은 영향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Why not?’이다. 안될 게 뭐가 있느냐는 그의 용감한 시도가 기존의 나의 삶에 대한 시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셈이다.”
-퍼포먼스 작업 초반에는 지지를 받기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고민이 신문에 얼굴 한 번 나는 거였다. 왜냐하면 그때도 여전히 돈을 집에서 받고 있었는데, 최소한 어머니한테는 아들이 독일 가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돈 끊어지면 큰일이니까… 엄마가 독일 말을 모르니 사진이 신문에 나오는 것이 중요했다. 잡지에 얼굴 한 번 나오기를 고대하고 고대했다. 그러면서 돈을 35살까지 지원받았다.”
-최초로 매거진에 실린 것을 기억하는가?
“물론이다. 3류도 아닌 4류 잡지였다. 잡지랄 것도 없이 일개 소도시의 공업고등학교의 교내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거라도 얼른 집에 보냈었다.”
-당신의 예술이 성장했던 결정적인 계기를 돌아본다면?
“그렇지 개구리가 3단계를 거쳐 성숙하듯이 예술가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나의 경우는 63년 테레비를 처음 쓴 것이 그렇고, 이번에 레이저를 적극 활용한 것도 그런 의미를 지닌다. 과거 부어맨과의 만남도 의미가 컸고..”
-뉴욕 거리를 바이올린 하나 끌고 걸어간 해프닝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아, 그거 남이 좋아하는 모양이야. 동양 사람의 고독, 네가티브한 것을 표현했다고들 하던데… 동양적 종교의 모습이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종교에 대한 관심이 큰가?
“아닌게 아니라 반신불수 되고, 할 게 없으니 머리만 도는데, 그래서 종교에 대한 생각 많이 한다. 유신론이나, 신의 창조를 생각한다. 역시 우주는 신이 만들었다는 것에 요즘 생각이 모아진다. 벌레 하나 만들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졌을 것인가. 다른 얘기지만 거미가 하나 살려면 그 근처에 3만 종의 벌레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저것 다른 영양분을 취해야 하니까. 이것은 다위니안 프로세스를 가지고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개 하나, 양 하나 만들기도 어려운데…”
-최근에는 양, 소는 물론 장기(臟器)복제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야 원래 실험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족속이니까. 누가 뭐래도 한쪽에서 반드시 생명의 복제를 실험하는 이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공했을 때이건, 실패했을 때이건 그 선후책을 미리 강구해 놓는 것이겠지.”
-당신은 나이를 의식하는가?
“30대에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괜찮은 작업을 해왔다. 지금은 내가 성공했다는 안심은 든다. 실은 그렇게 성공할 줄 몰랐거든.”
-성공의 비결이라면?
“하하. 우리 집에 돈이 있었거든. 독일도, 미국도 오갈 수 있는..”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뉴욕에는 전세계에서 모인 재능있는 무명의 예술가들이 많다. 수중에 돈이 없는 그들이 마음껏 작업할 방도는 없을 것인가?
“제도적인 지원은 영영 어려울 것 같이다. 예술이라는 게 실은 사고 파는 문제와 다름이 없는데, 예술이란 게 맹그는 놈은 4백만 명이 만들고 있는데, 그것을 사는 놈은 4명도 안되거든. 그런데 텔레비는 4개 회사가 4백만 대를 만들고, 또 사는 놈도 몇 백만이 된다. 예술이라는 게 본래 생활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많이 진보되면 보통 오락으로는 성에 안 차니, 그때부터 고도의 물건을 찾는 것이지. 취미의 고급이 예술시장인 셈이다.”
-당신의 예술의 핵심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굳이 한다면, 인티렉쳐리즘이 아닐까. 지성주의다. 나는 열정(Passion)보다는 지능을 많이 써왔다.”
-그 말은 조금 의외다. 당신의 작업 대부분은 퍼포먼스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퍼포먼스야 말로 강렬한 패션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가끔 가다 패션이 나올 때도 있지만, 그 작업의 준비는 지적인 승부이다.”
-지성주의의 기반은 끊임없는 공부인가?
“그보다는 영감이다. 예술에서 공부는 필요없는 것이다. 여러 해 전 호암상을 준다고 했을 때 갔을 때 마침 유명한 의학자도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내 예술에 이해가 깊었었는데, 그에게 예술이 어렵냐, 당신의 과학이 어렵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예술이 어렵다고 하더라. 그리고 이유를 말하기를 과학은 끊임없이 실험하면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오지만, 예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이 도움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 명답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아내도 비디오 아티스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를 소개한다면?
“이름은 시게코. 젊어서는 비디오 큐레이터였다. 맨하탄에서의 사회적 성공은 시게코의 도움이 컸다. 오래 전 내 작품 중에 피아노 페달을 입술로 핥는 작품이 있는데, 어떻게 소문이 나기를 페달을 먹은 예술가가 있다고 동경에 전해져서, 어떻게 그런 예술가가 있을까 해서 처음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시게코는 일본 나가타 출신의 여성으로 그 후 1963년 동경 소게츠 홀에서 공연하는 백남준을 보고 한 눈에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임을 알았다고 한다. 시게코는 첫 눈에 백남준에게 반했으나, 백남준이 작업을 위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는 통해 물경 14년 동안 그를 따라 다니다가 77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본래는 조각을 전공했지만 백남준을 만난 후 비디오 큐레이터를 거쳐 지금은 해프닝, 비디오 아트 분야에서 어엿한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아내의 어떤 부분이 특히 사랑스러운가?
“무던하고 자연스럽다.”
-한국을 찾을 계획은?
“우선 왼쪽 발이 움직여야지. 뉴욕에서는 한 시간 정도는 걷는 연습을 했다. 중풍 환자치고는 나는 비교적 운수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우선 말도 되고 정신은 대부분 살아 있으니까.”
-사주도 좋은 것으로 들었다.
“항상 재수가 좋았던 편이지. 옛날 비디오 신서사이저를 처음 만들었을 때, 야, 내가 돈이 있으면 이걸 공업화해서 목돈을 벌텐데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돈이 없어 포기한 것이 훨씬 더 좋았다. 아마 그때 일을 벌였으면 돈도 못 벌고 골치만 아팠을 것이다. 그런 식이다. 사주는 좋다. 사주에는 방랑하다 죽는다는 사주가 있는데 그것도 맞았다. 평생 방랑으로 살았으니까.”
-하지만 예술 안에 늘 정착해온 것이 아닌가?
“그런 셈인지도… 예술은 영생이니까..
인터뷰 시간이 한 시간을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 하는 것에 조금 부담을 느끼는 듯했고 마침 점심 때가 되었다. 점심은 해변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 중 그의 병을 감안해 특별히 식단을 주문한 곳인 듯했다. 웨이터가 “As usual?” 물었고 그가 “OK”라고 간단히 답했다. 야채가 주로 된 접시가 그의 앞에 놓였고, 백남준은 비교적 왕성하고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큼직한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들었다. 식사 중, 과거 그가 신문에 한 줄 나기를 고대하던 시절처럼 지금 무명으로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한 마디 해준다면 어떤 말이 될 것인가를 물었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재수가 좋아야 돼.”
그 말을 이해한 것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였다. 재수는 그냥 재수가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최선의 노력을 보탠 것을 전제로 한 후의 재수인 것이다. 앞의 두 가지를 제대로 해내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은 세계 예술의 무대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재수가 제3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을 뉴욕의 여러 무명의 예술가들이 확인해주었다.
한 시간의 인터뷰는 기자에게 너무 짧고 아쉬운 것이었지만, 백남준으로서는 그가 스스로 기자에게 말했든 “최상의 서비스를 베푼” 마라톤 인터뷰인 듯했다.
헤어지면서의 그의 인사는 “자, 이제 뉴욕으로 돌아가.”였다. 그 뉴욕은 단순히 지명으로서가 아닌, 그 또한 곧 돌아가겠다는 작업의 현장으로서의 지명을 뜻하는 듯했다. 몸은 잠시 쓰러졌어도 자신의 예술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그의 강력한 의지가 그 말에 묻어 있었다.
작품으로 보는 백남준의 예술약사


